알랭 드 보통 의 책 (우리는 사랑일까)을 한권 더 사고 그것을 끝내는 것으로 나의 주말은 시작되었다가, 끝났다.
아니 그 전에 먼저 감기기운이 있는데에 몸이 잔뜩 오그라들어
토요일 아침부터 병원엘 갔다가 정오가 되기도 전 삼일치 약을 지음으로써 토요일이 시작되었다.
요새 내 주위의 친구들의 대부분(이라고 해봤자 그 표본 자체가 작기는 하지만)은
알랭 드 보통에 열광하거나, 적어도 적지 않은 호감을 갖고 있는데
나 역시 이사람의 책들이,
누구는 너무 감상적이라거나 여성스럽다고 뭐라 할지 몰라도, 너무 좋아서
빠른 속도로 그의 책들을 사고, 또 빠른 속도로 읽고 있는 중이었다.
엄마는 금요일에 외갓집에 내려왔다가 어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외할머니 할아버지가 연료값을 아낀다고 보일러를 제대로 틀지 않고 주무신다면서
그러다가 추운데 '노인네' 병이라도 걸린다고 외갓집으로 전화를 했다.
전화의 요지는 '노인네'들은 요새같은 환절기에 특히 건강에 더 주의해야 하며
만약 하나라도 잘못되어 '노인네'들이 아프기라도 하면
다 자식들이 고달프니 꼭 따뜻하게 하고 지내시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왜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전화하면서 '노인네'라고 해?"
내가 최초로 엄마가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이런 호칭을 사용한것을 들었던 유년시절
했던것과 똑같은 질문을 현진이가 하고있었다.
'노인네'라는 건 분명히 '노인' 또는 '늙으신 분들' 같은 말보다
좀 더 불친절하고 좀 더 부정적인 표현인데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아무리 부모님이라고 해도)와 직접 대화하면서
이런 호칭을 아무렇지 않게 써대고 있다니,
아니 이건 엄마가 꼭 외가쪽 할머니 할아버지와 통화할 때 뿐 아니라
시댁쪽, 예를 들면 시어머니와 통화할 때도 같은 대목이라서
나는 이런 호칭이 통용되고, 이해되고,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이 대화의 문맥이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노인네' 판정을 받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왜 반발하지 않을까. 왜 좀더 정중하게 부르지 않고 있는 상대방에 대해서 기분나빠하지 않을까.
방금 생각이 났지만, 아마도 '노인'이라는 위치 자체가
'노인'이든 '나이 지긋하신 분'이든 아니면 아예 '노인네'든
좀더 정성스럽고 깍듯하게 불리운다고 해서
사회적 위치자체가 격상될 바 없는 계급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전적 실망이라고나 할까.
곧이어 현진이는
요새 새로 나온 몇 개의 핸드폰, 예를 들면 LG에서 나온,
커다란 액정을 달고 있는 초콜릿 폰의 얘기를 하면서
자기가 가진 핸드폰의 액정이 이제는 너무 작아서 답답하다고 투정을 부린다.
"니 인생에서 핸드폰 액정이 갖는 의미의 비율이 얼마나 되냐?"고
내가 심각하게 궁금해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80%"
고민없는 현진이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지 않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핸드폰 액정이 갖는 의미는 1%도 되지 않는다, 나는 확신했다.
그 1%조차, 만약 노안이 되어서 글씨나 숫자의 절대적 크기는 좀더 큰 사이즈로 요구되는데
핸드폰 액정의 사이즈가 상대적으로 작아서
일반적인 11자리의 핸드폰 번호를 구현하려면 절대적인 폰트 사이즈가
만족할만큼 크지 않은, 그런 분들의 케이스이거나
직업상 핸드폰으로 TV같은 걸 꽤 유심히 봐야 하는 사람이
액정 사이즈가 충분히 크지 못해서,
꼭 잡아내야 하는 디테일을 잡아내지 못하는 경우
뭐 이런 때에야 비로소 액정사이즈는 1%정도의 영향력을 인생에 미치고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조금 작거나 큰 핸드폰의 액정 사이즈는
우리 삶에 극히 미미한 영향만을 미칠 뿐이다.
현진이가 말한 80%는
일단 이런 미미한 영향력이 또 다른 해석 과정을 거쳐
인생에 미치는 영향력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흡사
살색 스타킹과 검은색 스타킹을 신었을 때의 차이가 1% 조차 안되지만
어느 누군가의 어느 순간에는 90%의 중요성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의 해석과정을 거친 후이다.
적절한 시기를 찾지 못해 주말 내내 두끼씩을 먹었지만
감기라는 핑계로 잘 먹고
잘 먹자마자 약을 꼬박 챙겨먹는 관계로
나의 정신은 혼미한 상태, 일찍 자야지